스마트폰 블랙홀 앞에 선 지갑
# 털털한 성격의 대학생 A씨는 가방을 어깨에 멘 이후에도 항상 습관적으로 3가지를 점검한다. 담배, 스마트폰 그리고 지갑. 가방 안의 물건들이야 거의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상관없지만, 항상 주머니를 들락날락 거리는 이 3가지 물건은 빼놓고 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흡연자인 A씨의 특성을 제외하더라도, 지갑과 스마트폰은 항상 주머니에 동반되는 필수품 중의 하나다. 이 중 지갑의 첫 번째 용도라면 경제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넣고 다니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1차적으로 현금이 있고, 신용카드와 기타 포인트 카드 등도 이 범주에 들어있다. 이처럼 꼭 필요한 물건들을 운반하는 도구였던 지갑 역시 반드시 갖고 다녀야 하는 물건으로 자리 잡았고, 이에 ‘남자는 지갑, 시계, 구두는 좋은 걸 써야 한다’거나 ‘지폐를 접지 않아도 되는 장지갑이 돈을 들어오게 한다’는 등의 관련 속설들도 생겨났다. 지갑은 산업사회를 거친 사람들의 필수품이자,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아이템 중의 하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도 그럴까?
트렌드 인사이트에서는 이미 다양한 아티클을 통해 지갑의 1차적 기능이 다른 기기로 통합되고, 이때문에 지갑의 물리적 필요성이 줄어드는 현상을 언급한 바 있다. 기존의 신용카드 기능은 물론이고, 다양한 쿠폰 및 포인트 카드까지도 스마트폰 내로 흡수될 것으로 전망되며, (관련기사- 구글지갑, 과연 지갑을 대신할 수 있을까?) 기존 현금의 기능을 대체하는 다양한 화폐들까지 등장하면서, 물리적 화폐를 운반해오던 지갑의 필요성에 의문 부호가 붙고 있는 것이다. (관련기사 – 새로운 화폐 “Buzz”의 등장)
지갑의 종말; 기능을 옮기고, 공간을 줄여라
이처럼 지금의 변화는 의문 없이 이용해 온 기존 물품들의 존재가치에 물음을 던지고 있고, 지갑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어떻게 답해왔을까?
지갑이 맞닥뜨린 이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은 지갑의 1차적 필요성이 이미 소멸했다는 가정에 기초해왔다, 즉, 경제구조의 급격한 전환은 기존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갑의 역할 상실을 초래했으며, 결론적으로 지갑의 외형을 현저하게 축소하거나, 다른 물건에 병합시켜버리는 방향으로 대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갑이 점유해 온 그 영역에 침범하는 선두주자는 당연히 스마트폰이다. 머니클립이나 카드지갑만 갖고 다니는 경우는 이제 일반적이 됐고, 스마트폰 케이스에 꼭 필요한 양의 현금과 한두 개의 카드만 넣는 사람도 많다. 이에 더해 스마트폰 내의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결제를 처리하는 때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즉, 지갑이 수행해왔던 ‘경제생활에 필요한 도구의 운반’이라는 1차적 용도가 다른 물건으로 이전되면서, 지갑의 외형이 축소, 삭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기본적인 경제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 점유해 온 물리적 공간의 축소라는 결과까지 동시에 초래했다. 이를 공간과 기능이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지갑의 변화; 줄어든 공간에 새로운 기능을 탑재하라
일반적으로 지갑을 둘러싼 변화 양상은 위에서 언급한 ‘기능을 옮기고, 공간을 줄여라’는 방향으로만 진행돼왔다. 실제로 ‘모바일 지갑’ 이라는 카데고리로 묶이는 다양한 스마트폰 내 결제 플랫폼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지갑 등의 액세서리를 제작해오던 회사들 역시 머니클립이나 카드지갑과 같은 대체품들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작,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기사에서는 지금껏 주목받지 못한 다른 방향으로의 접근에 대해서 고찰해보려 한다. 바로 지갑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에서의 접근법이다.
경제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운반하는 그 본연의 기능을 지갑이 그대로 수행하게 하되, 달라진 경제환경 때문에 축소된 지갑 내 잉여공간에 다른 기능들을 삽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갑의 본래적 기능을 다른 기기로 이전하고 그 줄어든 공간만큼 지갑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이전으로 이전 때문에 잉여공간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상에서 지갑이 점유하는 공간은 기존과 같지만, 새롭게 발생한 잉여공간에는 기존에 지갑 내에서 수행되지 않던 새로운 기능들이 탑재되기에 지갑이라는 물건이 수행하는 역할은 기존보다 다양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를 공간-기능 그래픽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이 그려질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지갑 안에 어떠한 기능들이 새로 탑재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 지갑을 든든하게, 스마트폰을 든든하게. Chargecard
Chargecard는 카드 형태로 제작한 스마트폰 충전기이다. USB 포트를 이용해 아이폰/ 안드로이드폰 충전 기능을 제공하는데, 일반 신용카드보다 약간 두꺼운 정도이기 때문에 지갑에 넣어다닐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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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gecard 측이 밝힌 제작 목적은 간략하다. “a charging cable for your iPhone portable enough for you to always have it on you(항상 소지하는 물건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아이폰 충전기)”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발견한 ‘항상 소지하는 물건’은 다름 아닌 지갑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제작목적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어 킥스타터에서 지난 8월 펀딩에 성공했으며, 현재 자체 홈페이지에서 판매까지 시작했다.
Chargecard를 앞서 설명한 ‘공간-기능’ 매커니즘으로 살펴보자. 지갑에 가득히 들어있던 카드가 스마트폰 내로 이동하면서 잉여공간이 발생했고, 이 잉여공간에 ‘핸드폰 충전기’라는 새로운 기능이 삽입됐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갑을 없애버리고 핸드폰 어댑터를 따로 갖고 다니는 것과 이미 익숙한 지갑을 갖고 다니고, 그 안에 Chargecard를 넣어 다니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일지는 소비자가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후자를 선택했을 때 Chargecard의 가격으로 25$을 지급할지의 여부도 소비자의 몫이다. 그러나 Chargecard의 시도는 지갑의 대항마로만 여겨지던 스마트폰과의 공존을 꾀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미가 있다. 스마트폰이 지갑의 기능을 흡수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소멸시킨다는 1차적 접근법에서 탈피해, 스마트폰이 흡수해 새로 창출된 지갑 내의 공간을 스마트폰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선순환적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 맥가이버로 만들어주는 지갑. MULTI
Chargecard는 지갑 내 발생한 잉여 공간의 일부를 새롭게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와 달리 지갑의 1차적 기능을 위한 외형만을 유지하고, 나머지 외형을 극단적으로 바꿔버리는 시도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MULTI라고 명명된 이 제품이 보여주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지갑은 10가지의 새로운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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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는 지갑계의 맥가이버칼을 표방한다. 기본적으로 MULTI는 3장의 알루미늄 판으로 구성돼 있는데, 고무줄로 고정된 판들 사이에 현금을 보관할 수 있기에 지갑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능은 문제없이 소화한다. 이에 더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알루미늄 판들은 드라이버, 병따개, 렌치, 스마트폰 스탠드, 자 등 총 10개(지갑까지 포함하면 11개)의 기기가 각각 담당하던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MULTI는 4월 21일 현재 이미 킥스타터에서 5만 달러 펀딩에 성공했다.
지갑의 미래, 아무도 모른다
모바일 지갑의 등장으로 일견 위기를 맞은 것으로 보이는 지갑. 가까운 미래에 지갑이 맞게 될 결말은 과연 어떤 방향에 서 있을까? 그때에도 여전히 바지 뒷주머니 혹은 자켓 한쪽 주머니를 차지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런 물건도 있었지.’라며 서서히 기억에서 없어지고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기능을 옮기고, 공간을 줄여라.’는 방향의 일률적인 접근법이었다면, 지갑의 종착지는 박물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뻔한 미래에 Chargecard와 MULTI는 하나의 전환점을 제시했고, 우리는 이를 통해 지갑의 새로운 2가지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1. 성공 가능성? 지갑에 물어봐
아무리 스마트폰의 불랙홀이 거대하다고 할지라도, 그 안으로 빨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지갑은 꼭 필요한 것’이라는 우리의 인식도 아직 완벽하게 흡수되지 않은 상태. 그렇다면 머니클립이나 카드지갑처럼 지갑의 기능이 축소되는 메가 트렌드에 수동적으로 동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Chargecard와 MULTI처럼 지갑이라는 물건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확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존의 물건들을 지갑 속에 최적화된 크기로 제작하고, 그 기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갖고 다니는 조그마한 물건을 팔고 싶은가? 사람들의 수요를 자극하고 싶은가? ‘꼭 갖고 다녀야 하는’ 지갑에 들어가는지를 먼저 고민하라. 그리고 위에서 살펴봤듯이 Chargecard는 범람하는 핸드폰 충전기 시장에서 무려 16만불을 펀딩, 런칭에 성공했다.
2.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파우치
지갑이 ‘꼭 갖고 다녀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장래에 지갑은 필수품들의 1차적 필터로서 기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현재 신용카드의 크기로 규격화된 지갑 내의 주머니들이 필수품들의 크기와 얇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갑에 들어간다는 특성을 무기로 소비자들을 공략하고자 하는 필수품들이 출시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Carzor Razor. 카드와 같은 크기와 얇기를 가진 이 면도기는 언제 어디서라도 면도를 해줄 수 있게 해준다. 당연히 완벽한 상태의 면도는 아니지만, 상시 휴대하는 물품으로서는 충분한 기능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비단 (아직 상시 휴대하는 물건까지는 아닌) 면도기가 아니더라도, 향수, 간단한 화장품, 손수건 등 일반적으로 휴대하는 물건들이 가득한 지갑도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돈만 넣고 다니던 지갑이, 필수품들을 넣고 다니는 파우치나 클러치의 기능을 담당하는 미래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지갑의 변화상, 효율성을 재정의하다
글의 본론에서 언급했듯이 지갑의 기능 축소에 따른 우리의 대응은 지갑의 외형까지도 줄여버리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비단 지갑에서뿐만 아니라, 격동하는 변화의 시기인 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대응이다. ‘필요가 줄면, 존재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효율적이라는 의견 말이다.
그러나 Chargecard와 MULTI는 이러한 천편일률적인 사고 너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필요가 줄었다고 지갑을 그대로 없애버릴 것이 아니라, 그 줄어든 공간을 새롭게 이용하려는 발상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갑의 필요가 줄었다고 해서 그 존재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면, 지갑이 가까운 미래에 맞이할 결말은 뻔하다. 그러나 이들의 전환적 사고를 통해 ‘뻔한 결말’도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고, 지갑 속에서 새로운 기능과 가치들이 꽃 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갑이 점유해오던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인식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렵게 만들어낸 그 인식을 없애버린 후, 또 다른 물건들에 그 인식을 부여하기 위해 마케팅 비용을 쏟기보다는, 지갑이 점유해온 그 인식 속으로 새로운 물건들을 포함시키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두가 짐작해오던 지갑의 미래는, 이제 아무도 모른다.